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문단 편집) == 문제점 == 천하의 질서를 다시 잡기 위해서 [[항우]]가 분봉을 고려해야 할 대상은 다음과 같았다. * 재건에 성공한 여섯 나라: 진나라가 육국의 종묘사직을 끊은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았고 이들이 여섯 제후국을 다시 세워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이 또한 각 지역 유지들의 명분 쌓기일 뿐이었다. 제나라에서 촌수가 먼 방계 왕족 [[전담]]이 죽은 후, 정통성 있는 제나라 마지막 왕 [[제왕건|전건]]의 동생 전가가 제나라 본국에서 옹립되었으나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전담 일족이 전가를 무찔러 내쫓은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항우 본인부터 반진전쟁 때는 초나라 부활을 명분으로 내세워 거병해놓고 정작 초나라 왕실의 정통 후손이기에 옹립된 회왕 웅심에겐 명목상 천자 직함만 줬을 뿐, 끝까지 바지사장 취급만 하다가 그냥 죽여버리고 자기가 실질적인 초왕이 되버렸으니 육국의 부흥이라는 명분은 이미 허울뿐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이 부분은 첫 시작부터 꼬였는데 [[진승·오광의 난]]만 봐도 진승은 초나라 부활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정작 그 자신이 초나라 왕이 되었다. 첫 스타트부터가 이 모양이었으니 당연히 후발주자들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애초 반란을 일으키며 내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도 결국은 육국을 그대로 인정하지만은 않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물론 진승은 위구를 위나라 왕이 되는 걸 허락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는지 진승의 부하인 무신이 조나라 왕을 칭하고 또 그 부하인 한광이 연나라 왕을 칭하는 등 난장판이었다.] 게다가 이 '재건에 성공한 여섯 나라'도 옛 왕실이 그대로 재건된 것은 아니라서 확실히 초나라, 한나라, 제나라. 위나라는 옛 왕실이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서로 다 같던건 아니다. 대부분은 실권자 따로 명목상 군주 따로였고 특히 위나라는 그 실권자가 왕이 될 수도 있었다. 본인이 거절했지만. 제나라의 경우 그나마 실권자도 군주도 그래도 같은 전씨였다.] 조나라, 연나라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달라서 조나라는 그나마 조왕을 칭한 무신이 죽은 후 조나라 왕족이던 조헐이 옹립되었지만 연나라는 결국 이때까지 또 그 이후로도 연나라 왕실이 연왕이 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육국 부활이 적어도 초창기에는 마냥 거짓이거나 완전히 힘이 없던 것만은 아니다. 예시로 초나라 왕가가 아닌데도 왕이 되었다가 초라하게 몰락한 진승에 비해 초의제를 세운 항량은 큰 호응과 지지를 샀으며[* [[조의제문]]에서도 온갖 욕을 먹은 항우와는 달리 항량은 이 일로 정반대로 호평만 했다.] 그 반면 항우는 그 초의제를 죽였다가 명분을 잃고 패망했으며 진승의 난 도중 위구가 어쨌거나 주불의 다섯 번에 걸친 추천으로 왕이 된 것, 조나라 왕 무신이 죽은 후 조헐이 옹립된 것 어쨌거나 육국의 후예들도 분봉받았고 개인적으로는 장량이 유방 휘하에서 큰 관심을 가진 것이 한나라 부활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그 명분이 비록 유력자들에게 이용당하거나 허울뿐이었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 공적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고 본국에서 이탈해 항우를 따라온 장수들: 다시 말하지만 당시 군벌들은 자신이 공적을 세우면 왕후(王侯)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진 제국의 붕괴로 전 중국의 경제와 중앙통제가 완전히 박살난 현실에서 봉국을 떼주는 것 말고 따로 상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었다.[* 식읍 같은 방법도 있었겠지만 식읍도 어디까지나 중앙정부가 어쨌든 전국의 주인이 될 권위가 있어야 택할 방법이고 전국에 군웅들이 들어찬 상황에서 식읍 같은건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이 점에서는 유럽 중세의 봉건제와 유사한데 봉건제라 하면 군주가 신하들에게 땅을 하사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상은 오히려 신하가 차지한 땅의 소유를 군주가 특정 조건을 내걸고 인정한 것에 가까웠다. 이 점에서 제후왕들 중 이미 특정 지역에 알박아놓고 분봉 형식으로 소유를 인정받은 경우가 많은 것이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닮았다.] * 나라까지는 아니지만 뿌리를 박는 데 성공한 군벌들: 이런 세력들은 어느 정도 달래서 회유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 전도·전안은 항우의 입관에 협력했고, 팽월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 항우와는 별도의 경로로 입관을 시도한 제후들: 여기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항우가 그토록 꺼렸던 유방. 그 외에도 사마앙·공오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 마지막으로는 항우의 직속 부하들이 있겠는데, 이들 중에 왕으로 봉해진 것은 영포뿐이었다. ~~잔반처리한 보람이 있었다~~ 항우는 이들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항우가 아닌 그 누구라도 분봉에 애먹을 정도로 상황이 복잡해진 건, 진승의 난을 시점으로 각지에서 여러 인물들이 반란을 일으켜 중구난방으로 난립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유방은 이미 분봉할 당시 천하의 제후들을 어느정도 제압해놨고 가장 강력한 제후 항우마저 죽은지라 제후들이 반항하기가 좀 더 어려웠다.] 특히 아무런 지위도 없던 진승이 대뜸 왕이 되니 너도나도 왕이 되겠다고 나서는 통에 진승의 부하였던 무신이 진승의 명을 받아 조나라 지역을 평정한 후 조나라 왕을 칭하는가 하면, 또 그 부하인 한광이 무신의 명을 받아 연나라 지역을 평정한 뒤 연나라 왕이라 칭하는 등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유방은 항우로 인해 반역하지 않는 신하가 바보 소리 듣게 되었다 말했지만, 이미 적당히 세력있으면 반역하는 시대가 열린 셈이었다. 항우가 내린 결론은 사실 어느 정도는 자기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적이 있었고, 또한 어느 정도는 타협적인 것이었다. 진나라 멸망에 가장 큰 공훈을 한 건 자신이고 항우 자신이 분봉의 결정권이 있다는 것은 당시 전 중국에서 넘버 원은 항우고, 항우의 힘이 전 중국에서 가장 세다고는 하나 나머지 군벌들을 압도할 수준은 아닌 만큼 어느 정도는 대우해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항우 자신의 부하들을 어느 정도 챙겨주면서, 동시에 과거 정통 육국의 후예에 대해서는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본거지에서 쫓아내고 한지로 몰아내며 영토를 깎아내리는 조치를 취했다. 정통성이 없고 자신에게 공적도 세우지 않은 군소 군벌들은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이는 방향성이 불분명한 결론이었다. __확실하게 명분론에 따라서 옛 [[춘추전국시대]]의 봉건제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며, 실리론에 따라서 항우의 부하들이 전국을 지배하겠다고 명백하게 선언하는 것도 아니었다.__ 그나마 모습을 보면 춘추시대의 체제([[초의제|허수아비 천자]]+[[춘추시대|제후들의 난립]]+[[춘추오패|제후들 중 제일 힘있는 존재가 패자가 됨]])와 비슷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항우가 회맹 같은 것을 연 것도 아니요 명목상으로나마 초의제를 잘 섬기는 척을 한 것도 아니다. 춘추오패들과 항우가 같은 점이라면 힘이 있다는 것 정도였는데,[* 춘추오패들도 힘이 있기는 했지만 남의 나라를 막 분봉해주고 할 정도의 힘은 아니었다.] 항우는 스스로 패왕이라 칭했지만 정작 그 유래가 된 '패자'의 자격과는 완벽하게 정반대였다. 패자(覇者)는 기본적으로 '''존왕'''양이를 내세우게 되어 있다. 초의제를 시해하여 존왕을 버렸다. 그렇다고 이미 각지에 토착 군벌 세력이 자리잡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봉건제로 회귀하자면 초의제를 겉으로나마 잘 섬겨야 하는데 항우 성질머리에서는 될턱도 없고 다른 왕들도 겉으로라도 잘 섬길 거라고 기대하기는 힘들고[* 가장 큰 문제는 초나라가 은근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초인목후이관]]에서 보듯 초나라 사람은 무시당하기도 했다. 비록 진나라 멸망 과정에서 초나라 부활을 외친 진승, 초의제를 옹립한 항량, 장한을 깨부순 항우, 진왕의 항복을 받아낸 유방 등 초나라 출신들이 큰 활약을 해냈지만 그 사고가 한순간에 뒤집히긴 힘들 테니 초나라 황제를 명목상으로라도 자기네 군주로 받들지는 의문이다.] 항우가 제 부하들로만 전국의 지배를 확실히 하자니 앞에서도 보았듯 항우의 군세가 전국을 장악할 정도가 아니니 그것도 불가능했다. 분봉 조치 자체의 영향을 본다면, 분봉 조치는 결과적으로 '''엉망이었다'''. 광무 대치 당시 유방의 비난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항우가 제후들을 분봉한 기준은 순전히 '''자신과 친하거나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더 챙겨주는 게 당연하고, 항우 자신도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할 필요성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을 챙겨주는 과정에서 정통성 있는 육국의 제후들은 영토가 반토막나는 등의 피해를 입었고,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부하 장수들이 감복해서 항우에게 완전한 충성을 바칠 정도로 통 크게 쏴줬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결국 이는 처음에는 잠재적인 불만을, 나중에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다. 물론 당시 상황이 육국 후예, 중소군벌, 자신의 부하 등등 매우매우 구성요소가 다양한 이들을 분봉시켜야 하는 만큼 모두가 만족할 만큼 분봉해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하다못해 자기 부하들조차 불만을 가질 정도로 분봉해놨다는 건[* 더 심각한 문제는 위에 있는 왕들 항목 중 유일하게 항우의 부하이면서 왕으로 봉해진 사람은 영포 하나뿐인데 그 영포마저도 불만을 가졌다.] 항우의 분봉 조치가 대실패임을 보여준다. * 회왕이 관중왕 약속을 할 때 먼저 관중에 들어와 진왕 자영의 항복을 받아내어 관중왕 자격이 있던 [[고제(전한)|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파, 촉, 한중 땅으로 내몰았다.[* 현 사천성과 섬서성 남부 일대로 후대 [[촉한]]의 영토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촉 땅은 전한과 후한을 거치면서 발전해 삼국지 시기쯤 되면 중원의 주들만큼 내실 있는 알짜배기 주가 되었지만, 유방이 들어간 시절은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뒤떨어진 변방 지역이었다.] 관중은 전국시대 옛 육국을 제외한 진나라 영토를 가리키는 말로 파촉이 이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파촉에 내몬 것이다. 하지만 파촉은 [[춘추전국시대]] 진秦에게 정복되기 전까지 다른 문명이 있던 이민족 영토로[* 진나라가 파촉을 정벌한 것은 기원전 316년, 즉 항우의 제후왕 분봉에서 '''겨우 110년 전의 일이다'''.] 진 덕분에 생산력은 있었지만 중원에서 완전히 소외된 땅이었다. 파촉 방어와 관중 진출의 교두보인 한중 분지는 장량이 항백을 설득시켜 겨우 받은 것이었다. 당시 패공 군벌은 현대 중원의 동쪽 끝인 [[장쑤 성]], [[안후이 성]] 일대인 패(沛) 출신인데 서쪽 끝인 [[쓰촨 성]]에 던져버리고 10만 군사 중에 3만 명만 파촉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파촉으로 가는 길도 험난해서 병사들이 대거 탈영한 건 덤. * 눈엣가시 같은 유방을 파촉에서 나오지 못하게 틀어 막으려고 항복한 진나라 출신 장군들을 각자 관중 지역의 왕으로 임명해 삼진(三秦)을 설치한 것 자체는 일단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특히 삼진왕들 중 필두인 [[장한]]은 현역시절 무수한 전공을 세우며 망조가 든 진나라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일조한 명장이었으니 진나라 백성들을 이끌고 군사적으로 유방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문제는 항우가 진나라 백성들을 대거 학살하고 유방이 살려준 진왕 [[영자영]]을 죽여버렸기 때문에, 명장으로 알려진 장한조차도 항우에게 항복하고 왕작을 받았다고 진나라 땅에서 매국노 취급을 받은데다, 항우가 함양성까지 약탈과 방화, 파괴로 쑥대밭을 만들어놓고 떠났기 때문에 기본적인 군사나 군량조차도 모을 수 없어서 고작 몇개월 뒤에 유방 휘하 한신의 암도진창 공세 한 방에 무너졌다. * 어쨌건 정통성은 있었던 옛 육국의 왕들을 한구석에 처박고 그 자리에 신하들을 왕으로 세워 기존 세력과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 장이는 상산왕이 되고 장이의 부하였던 신양과 사마앙도 왕이 되었는데, 조나라의 대장군이자 장이와 비슷한 명망을 가지고 있던 진여는 터무니없는 대우를 받아 크게 분노했다.[* 이로 인해 원래 좋았던 장이와 진여의 사이는 [[거록대전]] 전부터 삐걱대고 있었다지만 크게 나빠졌다. 그렇다고 장이가 만족할 정도로 화끈하게 쏴준 건 또 아니라서 결국 장이는 유방에게 투항해 버렸다.] * [[팽월]](彭越)은 나름대로 세력이 있었지만, 항우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논공행상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팽월이 이로 인해 불만을 가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오예의 지휘 아래 싸운 백월 역시 철저하게 백안시당했다. 이래놓고 또 오예의 부하인 매현에겐 무관 공략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10만호나 줬지만, 무관 함락의 주인공인 유방은 파촉으로 쫓겨나서 일관성이 부족했다. * 제나라의 일개 장수였던 전도는 제나라 왕이 되고, 본래 왕이었던 전시는 교동왕으로 쫒겨났는데 전시를 앞에 세우고 제나라의 실세 노릇을 하던 [[전영]]은 엄청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이런 문제점이 겹치면서 '''모든 제후가 항우에게 불만을 품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